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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좋은 날, 궁궐을 걸어보세요

위 진가천대 길병원 심장내과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궁(宮)'과 '궁궐(宮闕)'을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궁과 궁궐은 그 규모나 용도가 엄연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궁(宮)은 비단 왕과 왕비뿐 아니라 왕족들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생활공간 목적의 건물들을 의미한다. 궁궐 내에서 임금의 침소 건물을 침전이라고 하며 남쪽을 향해 건축된다. 침전의 뒤쪽이면서 궁궐의 한가운데 위치한 건물은 한자로 `가운데 중(中)’을 써서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고 하고, 중궁 뒤편에 있는 궁은 `뒤 후(後)’를 써서 `후궁(後宮)’이라고 한다. 침전의 동쪽으로는 세자가 거처하는 공간인 `동궁(東宮)’이 있었다. 궁궐 내에서 왕족들이 거처했던 장소의 이름에 따라 임금의 정실부인인 왕비를 중궁 또는 중전, 측실들을 후궁, 세자를 동궁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왕자나 공주가 결혼하게 되면 임금이 머무는 궁궐 밖으로 나와 따로 살림을 차려야 하는데 이들이 살던 집도 궁이라고 한다.

궐(闕)은 궁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과 망루를 의미한다. 궐은 일반적으로 임금이 거주하는 궁에만 존재하고 궐내에는 일상 생활 공간인 궁뿐만 아니라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의논하고 사무를 보는 업무공간들도 존재했다. 따라서 `궁궐’이란 궁(宮)과 궐(闕)이 합쳐진 합성어로 임금과 그 가족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주거공간과 국가 정무를 보는 업무공간, 왕을 보좌하는 신하들이 근무하는 공간 등이 복합적으로 갖춰진 곳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 궁궐에 속하며 이들을 조선시대 5대 궁궐이라고 한다. 전세계적으로 한 도시 안에 이렇게 많은 궁궐이 존재하는 도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시대 한성에는 임금이 계시던 이러한 궁궐들 외에 수많은 궁들이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현재는 대부분 소실되었다.

조선은 법궁과 이궁을 동시에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사용하였다. 양궐 체제는 본궁이 화재나 전쟁, 전염병 등 재난을 당했을 때 옮겨갈 수 있는 보조 궁궐을 두는 것이었다. 법궁(法宮)은 위계질서를 중시한 조선에서 국가의 핵심이자 정통성을 갖춘 제1의 궁궐을 말한다. 조선의 도성과 궁궐은 중국의 <주례고공기>에 담긴 건축원리에 따라 설계되었다. 이에 따르면 왕궁은 사각형에 준하며 궁궐 건물은 남면(南面) 배치를 원칙으로 하여 전각이 남북 중심축 일직선상에 반듯하고 엄격하게 배치되어 위계질서와 공간의 통일성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궁궐을 중심으로 남쪽을 볼 때 왼쪽, 즉 동쪽에는 역대 군주의 위패를 모신 종묘를, 궁궐을 중심으로 오른쪽, 즉 서쪽에는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신 사직단을 건설하도록 설계했다. 이러한 건축 원리와 입지 조건, 정통성을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법궁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으며 바로 경복궁이 조선 최초의 궁궐이자 법궁으로 만들어졌다.

이궁(離宮)은 법궁에서 떨어져 있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기본적으로 보조 궁궐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첫번째 이궁인 창덕궁은 경복궁이 건축된 지 10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아 지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현재의 서울인 한성이 계속 수도였던 것은 아니었다. 건국 3년차인 1394년 개경에서 한성으로 천도했지만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은 1399년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이후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다시 한성으로 재천도를 결정했고 사전 작업으로 이궁 건설을 명했는데 그렇게 건설된 이궁이 바로 창덕궁이다. 경복궁은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정도전이 지은 궁궐이고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자신의 형제들과 정도전 세력을 살육한 곳이었다. 그런 곳으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태종은 1405년 한성으로 재천도하면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곧바로 이어했고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창덕궁 옆에 수강궁이라는 별궁을 지어 거처로 삼았는데 이후 성종 대에 크게 증축 확장한 뒤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고 이궁으로 삼았다.

우리가 보기에는 모두 똑같은 궁궐이지만 당연히 이궁이 법궁보다 격이 낮았기 때문에 규모가 작았고, 경복궁 외에 전각이 남북 중심축 일직선상에 반듯하고 엄격하게 배치된 이궁은 한 곳도 없다. 이는 다른 궁궐들이 법궁으로서 지형적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궁은 까다로운 건축원리에 의해 설계되어 획일화되고 인공적인 느낌의 법궁과 달리 지형에 따라 자연친화적으로 설계되어 다양성과 자유로움,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기 때문에 조선의 역대 왕들은 법궁인 경복궁보다 이궁인 창덕궁을 더 애용했다.

조선 전기에는 법궁인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과 창경궁 이렇게 3개의 궁궐이 존재했다. 그러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파천하면서 한성을 떠나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불타 버렸다.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수한 정릉동 행궁에 임시로 기거했는데 이후 광해군 대에 증축 확장한 뒤 이름을 경운궁으로 바꾸고 정식 궁궐로 승격시켰다. 경운궁은 인조반정 이후 200년이 넘도록 오랫동안 버림받았다가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 후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뒤 경운궁에 머무르면서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과 물자가 소모될 것으로 예측되자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광해군 대에 창덕궁이 재건되었으며 양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궁인 경덕궁을 지었고 이후 영조 대에 이름이 경희궁으로 변경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인해 다시 소실되었기 때문에 인조 이후 조선 후기 많은 왕들이 경희궁에 거처하며 정사를 보았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 동궐이라 지칭했고 이와 대비시켜 경희궁은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이라 불렀다. 경희궁은 조선 후기 여러 왕들이 이궁으로 사용했으며 규모가 컸던 거대한 궁궐이었으나 고종 대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헐렸다. 현재 남은 전각이 거의 없고 협소한 탓에 조선의 5대 궁궐 중 사람들에게 가장 알려지지 않은 궁궐이기도 하다.

조선 전기까지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궁궐로 사용되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이 사용되었다. 조선 말 고종이 즉위한 뒤에는 경복궁을 중건해 사용하였지만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덕수궁이 황궁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궁궐의 역사는 곧 조선의 역사이기도 했다.

날씨 좋은 주말, 근처 궁궐을 걸으며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건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