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인마케터
소중한 점심시간, 차갑게 반짝이는 겨울 볕 아래 코끝을 콕 찌르고 넘어가는 뾰족한 공기가 되게 좋았는데, 눈치 없는 후배님이 방해를 한다. 연말 실적 압박은 자꾸 내 등을 떠밀고, 행사 지원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아니 근데 뭐 연말에만 이런가, 연초에는 이제 시작이라고 파이팅, 여름에는 휴가철 소비자 잡는다고 파이팅, 가을에는 가을 명절 공략한다고 또 파이팅. 정말 다들 파이팅이 넘치신다. 일 년 내내 반복되는 타이트함에 하루하루 발등에 떨어진 불 끄면서 같이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회사 생활 5년 차 뜨거운 어느 여름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한 마리 경주마가 되어 모니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달리고 있었다. 째깍째깍 시간은 갔고, 이미 퇴근 시간은 훌쩍 지났지만 난 여전히 아침과 같은 자세다. 「문자왔숑!」 배달시킨 저녁이 도착했다. 순간 눈물이 주르륵. ‘어라?’ 아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전개인가. 전날 야근한다고 햄버거 먹었고, 그 전날도, 그 전전날도 햄버거 먹었는데 저녁 메뉴가 또 햄버거라 그랬나. 아니면 겨우겨우 시간 맞춰 잡은 소개팅이 오늘 다시 한번 취소돼서? 그것도 아니면 점심에 남긴 김치찌개가 불현듯 생각나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난 나도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세상은 내 눈물 따위 아무 관심 없었고 시간은 가 해는 지고 다시 떠, 나는 여전히 어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번 달 실적 악화 원인은 10장도 넘는 보고서를 작성해 올리면서 내 눈물의 원인은 둘째치고 지금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뭔지도 몰라 가슴이 답답했다. 어깨가 결리고 두통이 왔다. 시간이 지나자 급기야 두 눈이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되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모니터에 파묻힌 동료들을 뒤로한 채 나는 지금 새빨개진 눈 때문에, 병원에 가는 거니까 절대 미안하지 않아도 된다고 애써 생각하며 사무실에서 탈출했다. 아니 근데 한 여름 광화문 사거리의 공기가 이렇게 상쾌했나? 쪼그라들던 어깨가 자연스럽게 쭉 펴졌다. 동료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은 이미 잊었고, 병원은 무슨 이내 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 저게 있었지!’ 어릴 때부터 미술관을 정말 자주 다녔는데 회사 생활을 한 후로는 내가 출근해야 미술관이 문을 열고, 내가 퇴근하면 미술관도 문을 닫고 퇴근한다는 꽤 논리적인 핑계로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일찍 퇴근하게 된 오늘은 묻고 따지지도 않고 매일 지나치기만 했던 사무실 옆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때 본 전시가 뭔지 기억나진 않지만, 타이레놀 대신 내 두통을 없애 준 건 확실했다. 모든 것에 원인을 따져 결론을 내야 하는 회사에서와는 달리 그곳에서는 펼쳐지는 모든 것들을 그저 눈에 넣었다가 가슴에 품어도 혹은 그냥 삭제해도 상관없었고, 감상평을 제출해야지만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내 뒤를 졸졸 쫓으며 기다리는 누군가도 없었다. 그 사실 만으로도 긴장이 풀리고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느끼는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옆 건물에서 가쁜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그 틈에 쉬었던 숨 덕분에 월급쟁이 15년 차를 훌쩍 넘긴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싶다. 세상에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제 겨우 4학년인 조카 녀석도 평일은 물론 주말까지 학원에 가니 말이다. 여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삶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규칙하고 예외적인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니까.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면 각자의 작은 틈 속에서 건강한 숨을 쉬어 보자. 숨을 쉰다는 건 정말 중요하니까, 한 번의 숨은 분명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줄 테니까! 나는 오늘 두 시간 일찍 퇴근한다. 그리고 북악산 아래 고즈넉이 자리 잡은 미술관에 갈 것이다. “후배님아, 데이트 아니다. 미안, 근데 선배는 지금 무척 설렌다.”

자, 그럼, 여러분께 건강한 숨쉬기에 딱 좋은 미술관을 알려드릴게요. 다들 너무 바쁜 건 알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 두 시간만 내세요. 운동은 필수라면서요, 건강한 숨쉬기 운동도 이제 필수입니다!
오늘 제가 갈 북악산 아래 자리한 미술관인데 김환기 화백이 작고한 후 환기재단에서 설립한 곳입니다. ‘아~’ 할 만큼 분명 한 번쯤은 그의 작품을 본 적이 있을 텐데요, 보시면 느낄 수 있겠지만 전통과 자연, 그것들의 조화에 정서적으로 집중되고 평온함이 느껴집니다. 이런 작품들과 자연이 잘 어우러지도록 만들어진 미술관이라 이곳에 가면 자연스럽게 평온해지죠.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다를 테니 직접 가보세요. 작품을 향하는 시선 뒤로 창이 보이고 밖으로 펼쳐지는 자연을 목도하는 설레는 순간을 경험해 보시길.

이곳은 최근 북촌 한옥마을에 새로 생긴 미술관입니다. ‘Futura’는 라틴어로 미래를 뜻하는데, 한국의 전통 그 자체인 북촌에 그 터를 잡았다는 것만 봐도 이 미술관이 생각하는 바가 느껴지지 않나요? 지금 미술관 개관 기념 전시가 진행 중입니다. 이 미술관 자체를 보여주듯 기계가 자연을 꿈꾸는 모습을 상상하여 AI가 만들어낸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전시. 전시를 보고 난 뒤 3층 테라스로 가 눈앞에 펼쳐지는 한옥의 기와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도 만끽하시길.

이곳은 명불허전 휴식을 취하기에 최고의 장소입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넓은 공원이 펼쳐지는데, 중앙의 연못 그 주변의 넓은 녹지 공간이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듭니다. 시원하게 넓은 공간을 촘촘히 채우는 전시들은 하루가 아닌 며칠 몇 개월에 걸쳐 천천히 마음에 담는 것을 추천합니다. 지금 진행하는 기획 전시는 아마도 전시가 종료되는 날까지도 엄청난 인파가 몰릴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에곤 실레의 ‘겨울나무’ 때문에 두 번 세 번 찾아갔답니다. 마음이 풍만하게 채워지는 만큼 수많은 인파에 정신은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상설전시관 2층에 ‘사유의 방’이 있으니까요. 근엄하면서 온화해 보이는 두 점의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며 고요한 사유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